퍼실리테이션
facilitation의 어원을 보면 '쉽게 만든다'는 뜻이다. 무엇을 쉽게 만드는가? 집단 구성원 간의, 혹은 집단 간의 소통과 협력이다. 퍼실리테이션은 사람들 사이에 소통과 협력이 활발하게 일어나 시너지가 생기도록 도와주는 행위이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퍼실리테이터
facilitator라고 한다.
왜 퍼실리테이션이 필요한가
인간사회의 소통과 협력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은 이견, 자기주장, 경쟁, 갈등과 분쟁으로 가득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첨예한 국제정세, 신고리 원전에 대한 찬반양론, 회사 내 부서간의 갈등, 학교친구들 간의 편 가르기, 가족 간의 오해와 상처… 이런 일들이 쉽게 해결될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아질까? 물론 쉽지 않다. 그러나 퍼실리테이터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통과 협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대화가 전제돼야 한다. 대화란 무엇인가? 20세기 천재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대화란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의미의 강'과 같은 것이며, 따라서 옳고 그름을 다투는 논쟁과는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대화란 '너와 내가 각자 의미의 시냇물이라고 한다면 너의 의미와 나의 의미가 만나 더 큰 의미의 강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공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다섯 가지 요소가 전제돼야 한다. ① 사람들의 적극적 참여 ② 정보-느낌-견해의 소통 ③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공감(역지사지) ④ 공동의 의미발견 ⑤ 행동방향에 대한 합의가 그것이다. 이상적으로는 다섯째 합의까지 도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행동방향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도, 대화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관찰된 사고(思考)와 그렇지 않은 사고는 이후에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⑤'까지는 가지 못했어도 '③'이나 '④'에 도달했다면, '좋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세요. 우리 서로 다른 길을 가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는 합시다!'라고 말하며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퍼실리테이터의 요건
이같이 결코 쉽지 않은,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일을 위해서 퍼실리테이터는 많은 기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퍼실리테이션의 원류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필자는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ICA(Insitute of Cultural Affairs)로부터 퍼실리테이션을 처음 접했다. 40여년 역사를 갖고 있는 ICA의 '참여의 테크놀로지
Technology of Participation'에는 앞에서 제시한 ①~⑤의 다섯 단계를 잘 조직할 수 있는 기법들이 두루 갖춰져 있다. 참가자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카드에 적도록 하고 카드들을 벽에 붙인 후, 비슷한 아이디어들끼리 군집을 만든 다음 각 군집에 이름을 붙이는 합의워크숍기법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같은 기법을 익히는 것은 퍼실리테이터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좋은 칼을 갖고 있다고 무조건 훌륭한 검객이 되는 것은 아니듯이, 기법을 갖췄다고 유능한 퍼실리테이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법을 단지 기계적인 절차로 이해해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합의워크숍기법만 해도 겉보기에는 매우 단순해보이지만 각 절차마다 인간심리의 작동방식에 근거한 비밀들이 숨겨져 있다. 따라서 각각의 기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퍼실리테이터는 완전한 중립을 지향해야 한다. 즉, 대화의 과정만 도와줄 뿐이지 내용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얼핏 쉬워 보이지만,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사내 퍼실리테이터의 경우, 자기 의견을 개입시키려는 충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중립성과 더불어 강조돼야 할 것은 투명성이다. 절차가 투명하게 눈에 보여야 참가자들은 안심하고 자기의견을 내놓는다. ICA 참여의 테크놀로지가 갖고 있는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가 투명성이다. 혁신성도 중요하다. 퍼실리테이션을 단순히 서로 다른 의견을 기계적으로 모으는 기법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퍼실리테이션은 대화과정에서 사람들의 생각에 혁신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갇혀있던 생각이 활짝 열리고, 자기중심적 생각이 전체를 고려하는 넓은 생각으로 활짝 열리고,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가능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는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유능한 퍼실리테이터는 대화의 과정에서 이같은 '아하의 순간
Ah ha moment'이 일어나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평정심이다. 경험 많은 퍼실리테이터는 어떤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집단대화를 물 흐르듯이 흘러가게 만든다. 이것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에 의해 가능하다.
퍼실리테이션의 역할과 중요성
퍼실리테이션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수히 많다. 문제해결을 위한 창의적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 팀 빌딩, 부서간의 협력증진, 참여적 전략기획, 지역사회 개발, 갈등해소와 화합 촉진, 노-사-민-정(勞-使-民-政)의 정책합의 등등 … 물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거나 조직의 전략을 수립하는 일은 한두 사람의 경영자나 외부전문가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직구성원 혹은 이해관계자들은 자신이 직접 참여해서 내린 결정에 대해 주인의식과 사명감을 갖는다. 위에서 결정하여 상명하달
top-down식으로 전달한 정책과 구성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모아 수립한 정책은 설령 그 내용이 동일하더라도 조직의 미래에 전혀 다른 영향을 미친다.
21세기에 들어서 퍼실리테이션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복잡해져서 한사람의 머리로는 온전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워지고, 사람들의 입장도 날이 갈수록 더 첨예하게 갈라져서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융합'을 추구해야 한다. 이 같은 21세기의 핵심 딜레마 속에서 퍼실리테이션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